목회단상
저의 이번 귀향은 단순한 휴가가 아닌가 봅니다. 오랜만에 귀국한 아들을 맞이하는 제 어머니께서는 공교롭게도 감기가 심하게 걸리셔서 그 날 식사를 잘 못하시다가 제가 도착한 다음 날 병원에 가서 영양주사를 맞으셔야 했습니다. 어머니 친구분들은 우스개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미국에서 왔으니 있던 병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판에 몇 년 동안 안 걸리던 감기에 걸려 마스크 쓰고 드러눕는 시위(?)를 하느냐고 놀리십니다. 오랫동안 뵙지 못한 어머니께서 제가 도착한 다음 날 영양주사를 맞으시는 것이 과연 우연한 일일까요? 전 조금 고민되기 시작했습니다. (제 어머니께서는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여전히 감기로 고생하고 계십니다.) 그런데 영양주사를 맞으셔서 인지 어머니께서 식사하시는 것이 조금 나아져서 한시름 놓아도 좋겠다고 생각하던 도착 셋째 날, 갑작스런 큰 아버지의 부음이 날아 들고 저보다 조금 먼저 한국에 방문하신
제 큰 아버지께서는 최근에 치매로 고생하셨다고 합니다. 가족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시어 다들 황당해 했지만 평소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사셨던 모습 그대로 고통 없이 가시면서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 주셨고 또 가문에 처음 나온 목사라고 자랑스러워 하시던 조카인 제가 장례식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. 죽음과 삶에 대한 제 성찰은 다음 기회에 나누기로 하고 저의 서울 도착과 큰 아버지의 소천은 결코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제게 너무 큰 의미를 가집니다.
다시 도착 셋째 날로 돌아가서, 급한 대로 상가 조문을 마치고 달려간 건국대학병원에서 만난
특별히 김 집사님의 수술 날, 그러니까 저의 도착 넷째 날,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제가 대학시절에 섬기던 야간학교가 있던 수녀원을 찾게 되었습니다. 김 집사님께서 건국대학교병원에 입원하시지 않았다면, 그리고 제가 그 날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김 집사님께서 수술실에 들어가시지 않았다면, 이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. 다음 약속시간까지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던 터라 근처 지하철역을 향하여 걸어다가 저는 대학시절 이 역에서 내려 야간학교로 가던 것이 생각났고 마침 내리던 비로 인해서 인지 너무 시간이 오래 흘렀고 그 지역이 크게 개발되어 찾기는 어렵겠지만 한번 주변을 둘러 보자는 감상적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.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저의 수녀원 찾기는 역시나 하는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는 매우 가망성이 없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선교사 수녀님들이 이 지역을 떠나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실행되었습니다. 지하철역 출구로부터 걷기 시작하여 기억을 더듬어 수녀원이 위치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방향으로 두 세 블록을 걸었지만 그 길 양편의 단층 가정집들 중에는 수녀원의 문패가 붙어 있는 집이 있지 않았습니다. 결국 눈에 익은 집이 하나도 없는데 이런 멍청한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조금 더 걸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 지하철역 방향으로 돌아 갈 겸 디긋 자 행보를 하여 다음 길을 택하여 걸었습니다. 길을 걷던 중 제 기도는 설사 선교사 수녀님들이 지역의 개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살던 집을 옮기셨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. 그러다가 전 결국 왜 제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었나 하며 수녀원 찾기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. 그런 후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제 눈 앞에는 놀랍게도 <착한 목자 수녀원>이라는 문패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. 하나님 맙소사!
이 놀라운 발견에 대한 저의 첫 반응이 이랬습니다. “그런데 하나님 이건 또 뭡니까?” 이는 수녀원을 찾을 생각만 했지만 정작 찾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까닭입니다. 25년이 지난 지금 제가 아는 수녀님께서 이곳에 살고 계실지도 모르겠고 또 저를 모르는 수녀님들에게 저는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까 생각해 보니 벨을 누를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습니다. 시계를 보니 대략 30분쯤의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.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저는 벨을 누르면서 이 집이 제가 전에 드나들던 바로 그 집이냐고 물어는 봐야겠다는 심사였습니다. 참으로 놀랍게도 벨 소리를 듣고 인터폰으로 응답하신 분은 나중에 뚜껑을 열고 보니 Rita라는 필리핀 수녀님으로서 제가 야간학교 선생으로 활동할 당시에 이 수녀원에 계시던 분이셨습니다. 대문이 열려 들어 간 그 집은 옛 집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. 집 입구 벽에는 <한 영혼이 온 세상보다 소중합니다>라는 글이 크고 예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. 그 글은 제가 대학시절 기독운동가로 가졌던 종교적 신념을 되살려 냈고 아울러 미국에 와서 섬기던 교회에서 오래 미루던 목사 안수를 받고 얼마 후 그린빌로 목회하러 올 때 그 교회의 장년성경공부반 성도님들로부터 받은 권고인 <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목회자가 되세요>를 상기시켰습니다.
그런데 정작 저를 크게 놀라게 한 것은 Rita 수녀님과의 대화를 통해 이 분과의 만남은 바로 이 시점이 아니었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. 제가 알고 있던 또 다른 외국 수녀님은 미국에서 오신 분이었는데 언제나 서 수녀님으로 불렸습니다. 바로 그 분께서 수녀원에 살고 계셨는데 마침 지난 5월에 99세를 일기로 소천하셨고 이로 인해 군산에 가 계시던 Rita 수녀님께서 잠시 와 계셨던 것입니다. 가령 서 수녀님이 그 날까지 살아 계셨다고 해도 노령과 병환으로 저를 알아 보지 못 하셨을 것이고 거기에 살고 계신 다른 한국 수녀님들은 오래 전의 수녀원 역사를 알지 못하는 분들이시기에 현재의 수녀원이 예전에 제가 일하던 바로 그 집이라는 반가운 사실 밖에는 제게 알려 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. Rita 수녀님은 선교사 수녀님들이 자신들의 선교지를 버리지 않으셨고 시대와 주변 환경이 바뀌어 비록 전에 하던 자매원(기숙원)과 야간학교 사역은 그만 두셨지만 수녀를 청원한 분들이 첫 해를 보내며 자신들의 소명을 확인해 가는 곳으로 그 집을 전환하여 계속 사역해 가고 계신다는 고마운 말씀해 주셨습니다. 시간이 지나 제가 작별을 고할 때에 Rita 수녀님께서는 저의 방문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하신 후 또 다른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. 저와 함께 야간학교를 섬기던 분들 중 일부와 그 당시 학생들의 일부가 internet café를 만들어 소식을 주고 받으며 수녀원을 가끔 방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. (아직 Rita 수녀님께서 말씀하신 café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.)
저는 뜻하지 않은 수녀원의 발견/방문을 통해 교회는, 공동체는, 결국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. 이 주제에 관련한 저의 다른 교회 방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하겠습니다.


